Monday, February 28, 2011

몽골 울란바토르와 테렐지 - 칭기즈칸 후예들의 성기고 투박한 도시

몽골(Mongolia, 蒙古) 울란바토르(Ulaanbaatar)는 신비로운 땅이다. 끝없는 고원과 사막을 지나면 유목민의 흔적이 서린 검붉은 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1,300m에 위치한 울란바토르는 성기고 투박해도 몽골 제1의 도시다. 톨강(Tuul River)유역을 따라 20여 차례 이동하며 도시의 기초가 닦였고 그 이름도 수없이 변경됐다. 몽골혁명의 주인공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영웅’이라는 의미인 울란바토르로 이름이 정착됐지만 도시인의 삶 속에는 강렬함보다 부드러운 정서가 흐르고 있다.

울란바토르 인근 테렐지 평원에서는 칭기즈칸의 후예인 유목민들과 조우하게 된다.


유목민의 흔적이 서린 테렐지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길은 오랜 상념과 연결된다. ‘칭기즈칸’의 후예처럼 들판 속을 내달리면 대륙의 광활한 전경과 맞닥뜨린다. 울란바토르 북동쪽 80㎞에 위치한 국립공원 테렐지는 때 묻지 않은 몽골의 모습이다. 봄이면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고원은 겨울이면 눈덮인 들판과 희귀한 바위산이 펼쳐지며 먹먹함을 더한다.

몽골 유목민의 전통 가옥인 게르.
눈 덮인 테렐지를 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 주민들.

  
초원지대의 게르 가옥과 말을 타고 다니는 유목민들도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다. 양가죽으로 만든 둥근 이동가옥 게르는 몽골 유목민의 상징으로 오래된 구식난로처럼 생겼다. 테렐지에서는 말을 타고 고원을 질주하거나 하깅하르 노르 호수를 끼고 있는 헨티산맥까지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몽골 여행은 이렇듯 대지를 밟아보고 품에 안기는 게 묘미다. 말은 이곳 게르 캠프에서도 빌릴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는 10월 초만 되면 성급하게 첫눈이 내린다. 한겨울 기온은 영하 30~40도까지 곤두박질친다. 밤새 불어 닥친 눈보라는 도시를 감싼 4개의 검은 봉우리를 신령스럽게 뒤바꿔 놓고는 한다. 외곽에서는 초원에서 봤던 전통가옥 게르가 눈에 띈다. 러시아식 콘크리트와 새 건물로 채색된 시내를 멀리 벗어나면 아직도 정겨운 게르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게르 앞에 자가용들이 주차돼 있는 게 다소 낯선 모습들이다.

울란바토르 시내의 거리의 악사. 모자와 장화를 신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몽골 혁명의 주역인 수흐바토르의 동상. 동상 앞에서는 록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울란바토르 여행의 첫발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시작된다. 광장 중앙에는 ‘혁명의 영웅’인 수흐바토르 동상이 서 있는데, 1921년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한 주인공이다. 이곳 광장에서는 최근에는 각종 문화행사와 록 콘서트가 열린다. 국회의사당, 문화궁전, 국립오페라 극장, 자연사·역사박물관 등 주요건물들도 광장을 둘러싸고 자리 잡았다.
거리에 나서면 다소 익숙한 몽골의 문화와 마주친다. 멋쟁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국립 백화점을 중심으로 울란바토르의 상권은 조성돼 있다. 자세히 보면 중년층들이 즐겨 입는 의상이 친근하다. ‘’이라고 불리는 전통의상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겉옷에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달아놓은 형상이며 소매는 손이 감춰질 정도로 길다. 전통 모자인 ‘말라가이(malagai)’와 긴 장화 모양의 신발인 ‘구탈’을 신은 주민들의 구수한 패션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낯설지 않은 그들만의 문화

몽골은 20여 년 전 소련식 사회주의와 결별했다. 몽골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에 대해서는 친근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 한국어 학원들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고 젊은층 사이에서는 영어 대신 한국어가 오히려 통한다. 이곳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는 의미로 ‘솔롱거스(solongos)’라고 부르는데 그 기원이 예전 몽골에 왔던 한국 여인들의 색동저고리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간단 사원의 앳된 동자승들.
간단 사원은 공산정권 하에서도 종교 활동이 보장된 곳이다.


외곽으로 나서면 도심의 단면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도심 북서쪽에 자리 잡은 간단 사원은 몽골에서는 가장 큰 사원으로 공산정권 하에서도 유일하게 종교활동을 보장받던 곳이다. 사원 내부에서 만나는 귀여운 동자승과는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이 들어서 있다.
  
울란바토르 남쪽 톨강을 건너면 복드칸(Bogd Khan)의 겨울궁전이 다소곳하게 들어서있다. 몽골의 마지막 황제가 20년 동안 살던 곳으로, 톨강 강둑에 있던 여름궁전이 사라진 것과 달리 겨울궁전은 박물관이 됐다. 겨울궁전을 지나면 울란바토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이승 기념관(Zaisan Memorial)이다. 러시아의 무명용사를 기념하기 위해 언덕 위에 세운 대형 기념비에 주민들은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테렐지에서는 소와 양을 방목하는 전경과 흔하게 맞닥뜨린다.
울란바토르는 끝없는 사막과 고원 위에 들어선 아득한 땅이다.


이곳에서 시선을 멀리하면 고원도시 너머로 검붉은 모래산이 펼쳐진다. 산 중턱 잔설이 제국을 호령하던 옛 몽골의 생채기를 보는 듯해 가슴은 알싸해진다.

가는 길
몽골 울란바토르까지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3시간 소요. 겨울 시즌에는 눈, 바람이 많아 결항되기도 한다. 몽골 입국 때는 비자가 필요하다. 시내에서는 택시를 이용할 수 있으나 영어가 통하지 않으며 이동할 때는 전차를 이용하는 것도 흥미롭다. 화폐단위는 투그릭. 호텔에서 환전이 가능하며 규모가 큰 상점에서는 달러가 통용된다. 공중전화 대신 길거리에서 사설 전화기를 이용할 수 있다.

체코 프라하 카를교 - 삶과 세월을 잇는 소통로

중세의 다리는 성과 마을뿐 아니라 삶과 세월을 잇는 소통로다. 체코 프라하 카를교(까를교)는 보헤미안의 애환과 600년을 함께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블타바강의 가장 오래된 다리이기도 하다.

카를교는 겉과 속이 다르다. 블타바 강변에서 바라보는 카를교는 조연에 가깝다. 최고의 야경으로 일컬어지는 프라하의 야경을 추억할 때 카를교와 블타바 강은 프라하성의 버팀목이자 배경이다. 여행자들에게는 성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고, 소설가 카프카를 되새기며 다시 구시가로 돌아오는 길에는 사색의 연결로가 되는 곳이다.

카를교는 프라하성과 구시가 광장을 이으며 600년 세월을 보헤미안의 애환과 함께 했다.


다리 동쪽 탑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카를교는 세월만큼의 풍류를 선사하다. 다리는 강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한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진 채 이어져 있다. 다리 건너편으로는 짙고 깊은 블타바 강과 붉은색 지붕들, 프라하 성의 모습이 가지런하게 배열된다. 교각 위는 빼곡하게 구경꾼들이 채운다. 다리에서 공연을 펼치는 중년의 악단이나 거리의 화가들은 카를교의 한 단면이다.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몸을 기대던 다리 위에서는 보헤미안들의 애환이 녹아든 랩소디가 울려 퍼진다. 체코가 낳은 감독인 카렐 바섹(Karel Vacek)이 "프라하성과도 바꿀 수 없다"고 칭송한 다리는 영화, 드라마의 단골촬영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보헤미안의 애환과 사랑이 담긴 다리

카를교의 미학적인 가치는 다리 위에 놓인 동상들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다. 다리의 난간 양쪽에는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들은 각자의 개성과 사연을 지니며 카를교의 볼거리가 됐다.

카를교 양쪽에 세워진 동상들은 다리의 미학적 가치를 더한다.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상은 다리 위 동상 중 최초로 세워졌다. 가장 인기 높은 작품은 성 요한 네포무크(성 존 네포무크)의 상이다. 동상 아래 부조에는 바람을 핀 왕비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혀를 잘린 채 강물에 던져지는 요한 네포무크 신부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 동상 밑 동판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행운이 깃든다는 전설 때문에 그 부분만 반질반질하게 퇴색돼 있다.

카를교 위에서는 악사들의 품격 높은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소원을 빌어 반질반질해진 성 요한 네포무크 동상의 동판
탑 위에서 내려다본 카를교. 여행자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카를교는 그 사연과 역사가 천 년을 넘어선다. 9세기 초 나무로 지어졌던 다리는 홍수로 여러 차례 유실됐고. 현존하는 카를교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보헤미아의 왕인 카를 4세(까를 4세)  때다. 50년의 공사과정을 거쳐 1406년에 완공되는데, 600년이 흐른 최근에도 다리의 초석을 놓은 오전 5시31분을 기리며 축포를 쏘는 풍습이 남아 있다. 풍파를 겪어낸 보헤미안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리’로 이 카를교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추억하다

카를교는 프라하성과 구시가를 오가는 시간여행의 통로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1000년 세월을 간직한 프라하는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프라하성에서 내려다본 구시가 전경. 중세 건축물들이 단아하게 배열돼 있다.


카를교에서 앙증맞은 문패들이 가득한 네루도바 거리(Nerudova Ulice)를 지나면 프라하성이다. 성곽 내부의 황금소로는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들의 골목이자 프란츠 카프카가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변신], [성], [소송] 등의 작품을 써내려간 공간이다. 카프카 외에도 프라하는 음악가 드보르자크를 낳았고, 모차르트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였다. 성루에 오르면 블타바 강 너머 구시가의 울긋불긋한 전경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카프카가 집필을 했던 황금소로. 카페, 책방 등이 들어서 있다.
‘프라하의 봄’의 사연을 담고 있는 바츨라프 광장의 기마상


60년대 피로 얼룩진 `프라하의 봄`의 배경이 됐던 바츨라프 광장이나 천문시계 틴 성당으로 대변되는 구시가지 광장도 고풍스런 프라하를 단장한다. 매 시각 인형들의 춤이 시작될 때면 광장 앞은 고개를 쳐든 구경꾼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미로처럼 뻗은 골목에서 마주치는 건축물들은 프라하가 중세 건축의 전시장임을 보여준다. 고딕, 바로크, 로마네스크 양식의 빛바랜 담벼락들은 흐린 날 비라도 내리면 낮은 음성을 읊조리듯 친밀하게 다가선다.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매시 정각이면 인형이 나와 
춤을 춘다.
프라하성 내부 고딕양식의 성 비트 성당.


이방인들은 밤이면 뒷골목 낯선 바에 앉아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을 마신다. 700년 전통의 보헤미안 맥주는 ‘달그락’거리는 동유럽 특유의 둔탁한 골목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1,000년 된 거리와 600년 된 다리가 뿜어내는 묘한 매력은 도시의 잔상을 몽롱하고 알싸하게 변질시킨다.

가는 길대한항공 등이 인천~프라하 직항편을 운항 중이다. 열차를 이용할 경우 독일 뮌헨이나 오스트리아 에서 들어가면 가깝다. 입국 때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다. 불시에 티켓검사를 하니 버스 등을 탈 때 무임승차는 삼가야 한다. 달러나 유로는 거리 곳곳 환전소에서 쉽게 환전이 가능하다. 한국 민박집들이 20여 곳 성업 중이다. 최근에는 인근 중세마을 체스키 크룸로프까지 둘러보는 여행이 인기다.

인도 콜카타 - 두 얼굴의 도시

인도 콜카타(Kolkata, 구 캘커타)는 두 얼굴의 도시다. 영국풍의 정제된 건물과 뒷골목의 삶이 한 공간에 뒤엉켜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수도였던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생채기도 남아 있다. 갠지스강(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과 낡은 트램은 도시의 지난한 세월을 묵묵히 가로지른다.
  
갠지스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은 콜카타 서민들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성스러운 존재다.


콜카타는 색의 대비가 강하다. ‘이국적인 인도’에 대한 깊은 인상은 색감이 던져주는 화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콜카타의 첫인상은 노란색 택시로 채워진다. ‘블랙’이 뒤섞인 델리 뭄바이의 택시와는 또 다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번쩍이는 택시의 행렬은 이질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영국풍의 거리에 취하다
런던의 한 골목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는 것은 영국풍의 단아한 건물들이다. 초우링기(Chowringhee) 거리를 지나치다 보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잔영들과 맞닥뜨린다. 그중 ‘빅토리아 기념관(빅토리아 메모리얼, Victoria Memorial)’은 콜카타 여행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은 도시에 흐르는 면면을 잘 대변한다. 본 건물은 유럽풍으로 지어졌지만 돔은 인도 무굴식이며 내부는 영국 왕실의 역사와 업적을 담아내고 있다. 기념관 앞의 연못과 잔디밭은 젊은 청춘들의 밀애 장소다. 흰색의 뽀얀 건물과 짙은 피부색의 민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서 도시의 지난한 과거가 엿보인다.

빅토리아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빅토리아 기념관’.


대영제국의 좀 더 깊은 잔영을 만나고 싶다면 ‘비비디 박(B. B. D. Bagh)’으로 향한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은 그 용도를 달리하며 나란히 늘어서 있다. 분명 콜카타의 중심거리가 맞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트램이나 택시, 이탈리아제 피아트 차량들이 눈을 현혹시킨다. 동인도 회사가 있던 자리에는 주정부 건물이 들어서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 옆 커다란 연못에서는 주민들은 천연덕스럽게 몸을 씻거나 낮잠을 즐긴다.

‘비비디 박’에서는 영국풍의 건물과 도심풍경을 만날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도심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이 간신히 지나는 좁은 골목으로는 오래된 트램이 달린다. 인도 내에서 트램이 있는 도시는 콜카타가 유일하다.. 최근 들어 새롭게 단장했다고 하지만 털털거리는 느린 속도에 투박한 외형은 여전하다. 1870년대에 개통된 트램은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식민지 시대 때는 트램이 두 칸으로 나뉘어 운행됐다고 한다. 두 칸짜리 트램은 남아 있어도 그때처럼 계급, 남녀의 자리 구분을 두고 있지는 않다.


후글리 강변과 꽃 시장
후글리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도심의 색채가 변한다.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정돈되지 않은 서민들의 공간이 속살을 드러낸다.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릭샤 역시 델리, 뭄바이에서는 보기 어렵게 된 교통수단이다.

오랜 콜카타의 거리에는 사람이 직접 끄는 릭샤가 오간다.
하우라 다리 인근의 꽃시장 ‘믈리끄 가뜨’.


콜카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하우라 다리(Howrah bridge)는 흙빛 후글리강을 외롭게 가로지른다. 길이가 705m에 이르는 다리는 ‘라빈드라 세투’로도 불리는데 2차대전때 지어진 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빽빽한 다리가 됐다. 교각이 없는 하우라 다리 동쪽 아래로는 꽃시장 ‘물리끄 가뜨’가 들어서 있어 뒷골목 서민들의 삶을 떠받친다. 이곳은 유럽에서 만나는 단아한 꽃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미 골목 사이로 꽃을 치장하고 파는 사람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자욱하게 늘어서 있다.

꽃시장을 벗어나 붉은 담벼락을 지나면 후글리 강둑이다. 콜카타 주민들에게 후글리 강은 신성한 존재다. 해 질 녘 목욕을 하거나 성물을 바치는 행위가 강둑에서 펼쳐진다. 이국적인 도심풍경과 허상의 꽃향기를 털어내고,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도 하우라 다리가 배경이 된 이 강둑이다. 콜카타에서 숨 깊은 도시의 진면목은 이렇듯 외딴 어느 강변이나 골목에서 드러난다.

콜카타의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친근한 서민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인 페스티벌은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자인교의 대축제다.


유럽풍이든 서민적 삶이든, 단절된 것들을 담아내는 게 종교다. 콜카타에 흩어져 있는 인도 사원들 중 쉬딸나뜨지 자인교 사원(Sheetalnathji Jain Temple)이나 깔리 힌두교 사원은 도시를 채색하는 화려한 건축물들이다. 인도 동부 사원 중 최고라는 평을 듣는 쉬딸나뜨지는 오밀조밀한 색으로 단장된 섬세한 장식들이 시선을 끈다. 1년마다 한번 보름에 펼쳐진다는 자인 페스티벌 때는 사원 일대가 흥청거린다. 깔리 사원은 동부 벵골(벵갈) 양식의 독특한 외관이 돋보인다.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쉬딸나뜨지 사원.
빈민들의 어머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의 집.


콜카타는 노벨상을 받은 위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의미 깊다. 빈민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마더 테레사의 집과 시인 타고르의 생가도 시내에 남아 있다. 수도가 델리로 옮겨진 이후에도 콜카타를 지성과 문화의 수도로 칭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는길
한국에서 직항 편은 없다. 제트 에어웨이즈(Jet Airways) 등을 이용해 방콕을 경유하는 게 편리하다. 델리, 뭄바이 등 인도 각지에서도 연결편이 다수 있다. 인도 입국 때는 비자가 필요한데 비자 받는 과정은 많이 까다로워졌다. 콜카타는 환전소에 따라 환율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인도관광청(http://www.incredibleindia.co.kr/ )을 통해 다양한 현지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콜카타의 트램은 고풍스런 여행을 위해서라도 한번 타보면 좋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 자유와 혁명의 도시

카우나스(Kaunas)는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어느 나라나 그러하지만, 제2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언제나 수도의 그늘에 가려 올바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그득하다. 카우나스 사람들은 특히 그러하다.

예수부활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카우나스가 정식으로 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1408년으로, 6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Nemunas)강과 네리스(Neris)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이런 입지적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초기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요 거점 지역으로 통하고 있어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 역시 대단했다. 15세기 당시 독일기사단이 유럽 전체로의 팽창을 위해 동방진출을 꾀했을 때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수도인 트라카이 빌뉴스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빌뉴스 이전 트라카이가 수도였을 당시 독일기사단들의 침공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카우나스성. 현재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현재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전 유럽에서 감히 최강이라 불러 마지않을 리투아니아 국가대표 농구팀 잘기리스(Žalgiris)의 거점지역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부터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동유럽 허브로 지정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카우나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유러피안 드림을 쫓아 유럽으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고국 땅을 밟게 되는 우울한 장소로 변화되기도 했다. 작지만 복잡 다난한 도시, 카우나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구시청사 위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자유와 혁명이 도시 카우나스
과거 소련 도시들에는 전부 하나같이 레닌대로, 스탈린대로, 가가린대로 같은 소련 영웅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카우나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중심거리의 이름은 바로 라이스볘스 알례야(Laisvės alėja), 우리말로 하자면 ‘자유로’였다. 한때 이 도시는 금연도로로 지정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 미덕을 해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없는, 거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거리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유로는 언제나 거리의 악사들로 넘쳐난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에서 자유와 혁명의 분위기는 아주 유별나다. 1972년 5월 14일, 바로 이 자유로 한가운데에서 당시 20살이던 카우나스의 청년이 휘발유를 몸에 들이붓고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분신한 곳 근처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 뿐이다”라는 유서가 한 장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카우나스는 소련의 붉은 군대도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약 20년 후 소련 전체가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전에도 소련의 지배를 반대하는 분신자살은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그 어떠한 것도 카우나스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장발문화와 비틀즈(비틀스), 록음악도 카우나스에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 소련 내 히피문화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을 만큼 카우나스의 자유로는 구소련 내에 불고 있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이런 배경 덕에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같은 인근 국가나 중앙아시아 등과 비교했을 때 소련화가 가장 적게 진행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군사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박물관. 박물관 앞으로는 리투아니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위인들의 흉상들과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위치한 통일광장이 위치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야깃거리는 또 있다. 카우나스가 임시수도였을 당시 일본영사직을 맡아 일했던 스기하라 치우네(센포 스기하라, Chiune Sugihara)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6천 명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던 시기, 유대인들은 남미에 있는 섬들(네덜란드, 덴마크령)로 이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소련에서는 어이 없게도 일본의 통과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수 천명의 유대인들은 일본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 당시 스기하라가 일하던 일본 영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통과비자 발급을 불허했으나, 스기하라는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통과비자를 발행해서 6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구한 스기하라 영사가 근무한 일본영사관 건물, 현재는 스기하라 기념관과 아시아 지역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사진: 서진석>
과거 스기하라의 행적을 기념하는 ‘희망의 문, 생명의 비자’라는 문구가 리투아니아어와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다. <사진: 서진석>


현재 그가 일하던 영사관은 카우나스 최대 대학교인 비타우타스 마그누스(Vytautas Magnus)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속의 아시아 지역연구소와 스기하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아시아 지역연구소에서는 몇 년 전 한국학 강의도 시작했다. 하지만 2013년경 이 건물 전체에 일본을 홍보하는 일본문화원이 들어설 계획이다.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유럽은 일반적으로 구시가지가 그 도시의 행정중심지역인 경우가 많지만, 카우나스의 경우 자유로가 그 기능을 맡아서 하고 있고, 구시가지는 도시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카우나스의 영원한 경쟁상대인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복원과 홍보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에 비해 개발이나 보존 상태가 열악하지만 빌뉴스의 구시가지와 견주어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곳으로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7km의 자유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바로 이어지는 빌뉴스 거리(Vilniaus gatvė)가 바로 구시가지의 시작이다. 그 거리에 들어서면 나그네를 맞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자갈길과 예스러운 모습의 공중전화가 카우나스의 역사를 실감하게 해준다.
 
구시가지의 입구인 빌뉴스 거리. 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은 가장 번화한 대로를 수도의 이름을 따 ‘빌뉴스 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마이로니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카우나스 구시청사광장에 위치한 마이로니스 석상 주변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주요 볼거리들도 역시 성당이다. 빌뉴스처럼 대부분의 성당들은 소련 시절 다른 기능으로 변환되어 학교, 강당, 심지어 운동장, 사우나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우나스에 있는 성당 중 가장 훌륭한 곳은 빌뉴스 거리와 시청광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베드로 바울 성당 (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이다. 전쟁과 화재를 겪으면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 증축되어 리투아니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된 이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바로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Maironis)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카우나스의 대표적인 성당인 베드로 바울 대성당의 모습.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시청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구시청사(Rotušė)는 그 도도한 백색 이미지 때문에 ‘흰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542년 최초로 그 자리에 들어선 이래 성당, 감옥 등 여러 가지 기능으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18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아주 특별하게도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말에는 백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들과 들러리들로 주변 광장이 가득 찬다. 건물 한쪽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구시청사의 낮과 밤. 구시청사 광장은 주말이 되면 신혼부부들과 햇볕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광장 서편 강 쪽으로 위치한 알렉소토(Aleksoto) 거리에 위치한 페르쿠나스의 집(Perkūno namas)은 카우나스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고딕 양식 건물 중 하나로서, 리투아니아 중세 건물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손꼽힌다. 초기에는 길드 연합회, 그 후 예수이트 성회의 예배당, 드라마 극장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818년 보수 공사 도중 벽 안에서 리투아니아 전통신앙의 최고신으로 천둥을 관장하는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되어, 그 이름을 따 ‘페르쿠나스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현재는 동유럽 최대의 문호 중 한 명인 폴란드 출신의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행적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투아니아 고딕 양식 건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페르쿠나스의 집’.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예수부활성당의 모습. 언덕 아래에서 교회 입구까지 푸니쿨러를 타고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그 외 카우나스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박물관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안타나스 즈무이지나비츄스(Antanas Žmuidzinavičius)라는 조각가가 평생에 걸려 리투아니아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악마형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악마박물관, 20세기 초 음악과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투아니아 현대예술의 밑그림을 그려준 츄를료니스(Čiurlionis)의 작품이 전시된 국립츄를료니스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발가벗은 남자상으로 더 유명한 현대미술관인 질린스카스(Žilinskas) 예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악마박물관에 가면 죽어서 악마가 되어버린 스탈린 히틀러를 만날 수 있다. 2층 한가운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리투아니아 위에서 춤을 추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모습을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가슴이 숙연해지게 한다. 악마박물관은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들의 '새로운 악마'들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는데,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악마들은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지만, 아직 한국은 이곳에서 열외이다.

카우나스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도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교회인 예수부활성당(Kristaus prisikėlimo bažnyčia)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또한 교회 아래쪽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는 푸니쿨라(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한 종류)를 타고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11년 5월 19일부터 22일까지는 중세 한자 무역동맹 시절의 문화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중세문화축제인 '한자축제'가 카우나스에서 열린다. 한자축제는 과거 한자무역의 동맹도시가 모두 참여하는 유럽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중세시절 유럽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는 길
카우나스 시내에서 약 17km 떨어진 카르멜라바(Karmėlava) 국제공항에 라이언에어의 저가항공이 많이 취항한다. 더블린,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오슬로, 탐페레, 바르셀로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저가항공을 타고 편하고 저렴하게 입국을 할 수 있다.

수도 빌뉴스에서는 카우나스로 이동하는 버스와 기차가 수시로 출발하며 버스는 한 시간 40분, 급행열차의 경우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나, 현재 다른 서유럽 국가로 연결해주는 기차 노선은 전무하다.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같은 국제버스들을 통해서도 카우나스에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다.